청조는 1899년 산동 반도를 중심으로 시작된 의화단 운동에 대해 처음에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산동순무 육현을 파면하고 새롭게 원세개를 산동순무로 임명, 신건육군을 동원하여 강경하게 진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산동성에서 직예성으로, 의화단 세력을 확산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왔으며 의화단은 그해 6월 북경근방에까지 진출하였다.
결국 북경에 진입한 의화단은 부청멸양 구호를 내걸고 북경 내 독일공사와 일본의 공사관 직원을 살해, 이어 외국공사관을 포위 및 공격하기에 이르면서 점차 상황은 고조되어 갔다. 당시 북경에 있었던 공사관 직원들을 비롯한 서양인들은 공사관 및 거주지 주변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이에 저항하였으며 북경 내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한편 공사관을 비롯한 외국인 거주지가 공격을 당하고 이어 공사, 공사관 직원을 비롯한 자국민이 의화단에 의해 살해당하자 서구 열강은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 결국 연합군을 조직해 의화단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결성된 것이 바로 8개국 연합군으로 총병력이 3만 6천명에 이르는 규모였다.
< 연합군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일본군. 연합군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
< 일본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러시아군의 모습 >
<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모습 >
< 이탈리아군의 모습 >
< 영국군의 모습 >
한편 의화단의 확대와 연합군의 무력 간섭 속에 청조는 의화단을 진압하고 열강에 협조해야 한다는 대외협조파와 오히려 의화단을 이용하여 열강에 대항하자는 항전파로 나뉜 상황이었다. 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청의 실권자 서태후는 결국 항전파에 가담, 결국 청조는 의화단과 더불어 열강에 저항하기로 결정하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연합군 재빠르게 톈진(천진)을 점령, 이후 곧바로 청의 수도 북경으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열강에 대한 선전포고 이후 서태후는 지방의 각 군벌들에게 의화단과 함께 서구 열강에 맞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동남지방의 청나라 관료 및 군벌들은 이러한 서태후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연합군의 진격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 톈진 함락 후 노획한 무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일본군의 모습 >
< 북경으로 진격을 준비하는 톈진의 연합군 >
< 북경으로 진격하기 위해 톈진에서 출발하는 영국령 인도 기병대 >
상황이 이러자 결국 서태후는 북경을 빠져나와 서안으로 탈출하였고(이후 북경은 함락) 대외협조파에 속해 있었던 이홍장에게 연합군과의 화의를 맺도록 하였다. 이때 맺어진 것이 신축조약으로 이후 청은 열강에 대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또한 독일 외교관이 사망한 것과 관련, 순친왕이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직접 사죄하는 굴욕도 맞보게 되었다.
<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사과하러 독일을 방문한 순친왕 >
한편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하기까지 북경 내에 청군과 의화단에 의해 고립되었던 이들은 6월 20일부터 8월 15일까지 자체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버텼 냈다. 이를 흔히 북경의 55일이라고 하며 이후 할리우드에서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게 된다.
사진 출처 : https://visualizingcultures.mit.edu/boxer_uprising/bx_essay01.html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사이트(IWM)
http://mrlee.co.kr/pc/view/mystery/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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