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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현실, 잔인한 꿈 (괴담)

그 꿈은 늘 짜증 나는 순간에 시작됐다. 지하철 문 앞을 막고 선 남자, 계산대에서 동전을 하나씩 세는 할머니, 내 차 앞에 끼어들고 비상등도 안 켜는 SUV. 꿈속의 나는 그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밀었다. 선로 쪽으로, 계단 아래로. 밀 때마다 발끝까지 힘이 들어가서, 깨어 보면 이불이 침대 밑으로 차여 떨어져 있었다. 밀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그 시원함이 무서워서 눈을 떴다. 이런 꿈을 한 달째 꿨다. 정신과에서는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수면제를 줬다. 의사는 이 약 먹은 날은 절대 운전하지 말라고 2번이나 말했다. 수면제를 먹은 날은 꿈이 더 길었다. 꿈속에서 계단 아래로 밀린 할머니가 끝까지 나를 올려다보던 날, 나는 남은 약을 전부 변기에 버렸다. 그래서 자지 않기로 했다. 첫날 밤은 넷플릭스로..

미스테리,역사 2026.11.03

목포 시장 국밥집 (괴담)

나는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다. 박영수 할아버지는 우리 병동에 온 지 3주째였다. 폐렴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했다가 항생제를 4가지나 바꿔 맞았고, 그 끝에 장염이 와서 하루 10번씩 설사를 했다. 설사를 멈추는 약을 쓰니 배가 막혔고, 배를 풀어 주는 약을 쓰니 속이 쓰렸고, 속 쓰린 약을 쓰니 입맛이 없어졌다. 그사이 신장이 나빠졌고, 그다음엔 심장이 나빠졌다. 할아버지가 우리 병동에 올 때 들고 온 약 봉투에는 아침 한 번에만 알약이 14개 들어 있었다. 우리가 약을 줄이자고 해도 할아버지는 대학병원 교수님이 주신 약이라며 봉투를 끌어안았다. 물로 그걸 다 넘기고 나면 할아버지는 늘 같은 말을 했다. 배불러서 밥은 못 먹겠다. 식판은 거의 그대로 돌아갔다. 죽을 3숟가락 뜨고 나면 할아버지는 수저를 내려..

미스테리,역사 2026.11.01

점순이 할머니의 임종 (슬픔, 괴담)

이점순 할머니는 요양원 3층 끝방 창가 침대에서 4년째 살았다. 면회 기록부에 할머니 이름이 적힌 건 4년 동안 3번이었다. 아들 2명에 딸 1명이 있었지만, 본인부담금은 6개월째 밀려 있었다. 그 사실은 사무실에서 3층 요양보호사들 휴게실까지 금세 퍼졌다. 그 뒤로 할머니는 돈도 안 내는 할머니가 됐다. 할머니 호출 벨은 줄이 뽑혀 있었다. 밤에 너무 자주 누른다는 이유였다. 기저귀는 다른 방을 다 돌고 맨 마지막에 갈았고, 그사이 할머니 엉덩이에는 500원짜리만 한 욕창이 생겼다. 오후 3시 간식 시간이면 요양보호사들은 보호자들이 넣어 준 바나나와 두유를 이름표대로 나눠 줬다. 할머니 침대 앞에서는 그냥 지나갔다. 할머니가 물 좀 달라고 하면 돌아오는 말은 늘 비슷했다. 자식들도 안 찾는 양반이 왜 ..

미스테리,역사 2026.10.29

은밀하게 드럽게 (괴담)

동네 목욕탕이 이번 달 말에 문을 닫는다. 개업한 지 38년 된 곳이다. 나는 12년 동안 토요일 아침 7시마다 그 집 세신대에 누웠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는 아내와 같이 와서 나는 남탕으로, 아내는 여탕으로 들어갔다. 3년 전 아내를 보내고 나서는 일주일 중에 남은 약속이 그것뿐이었다. 남탕 세신사 김 씨는 말이 없었고 손이 무거웠다. 때수건이 한 번 지나가면 팔뚝에서 회색 국수 가닥 같은 게 길게 말려 나왔다. 김 씨한테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때를 다 밀고 나면 세신대 위에 떨어진 걸 손바닥으로 쓸어 모아 작은 지퍼 봉투에 담았다. 처음에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하수구 막힌다고 했다. 그 말을 12년 동안 믿었다. 물기를 머금어 묵직해진 봉투는 늘 세신대 밑 바구니로 들어갔고, 봉투 겉에는 매직..

미스테리,역사 2026.10.26

사장님은 저를 단 한 번도 때리지 않았습니다 (괴담)

사장님은 저를 단 한 번도 때리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검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고, 피고인석에 앉은 사장님은 고개를 더 숙였다. 방청석 맨 앞줄에서는 사모님이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손에 잡히는 걸로 때렸다. 소주병일 때도 있었고 허리띠일 때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밤마다 방문을 안에서 잠그고 책상까지 밀어 붙여 놓고 잤고,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면 이불 속에서 숨을 참았다. 스무 살 되던 해 겨울, 아버지가 웬일로 일자리를 구해 왔다. 산골 축사인데 숙식 주고 한 달에 200만 원 준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기 트럭으로 나를 거기까지 데려다줬다. 축사에 도착한 날 사장님은 내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며 금고에 넣었다. 내..

미스테리,역사 2026.10.25

의사가 되면 하고싶었던 게 있어 (괴담)

나는 경기도 외곽 요양병원에서 6년째 야간 간호사로 일한다. 밤에는 환자 140명에 간호사 2명, 간병인 몇 명, 그리고 당직 의사 1명이 전부다. 우리 병원 야간 당직은 대학병원 전공의를 마친 지 얼마 안 된 의사들이 돌아가며 서는 아르바이트였는데, 작년부터는 거의 매일 같은 사람이 왔다. 말수가 적고 손이 빠르고, 환자 보호자들한테 늘 허리를 깊이 숙이던 40대 남자였다. 그 의사가 화가 나면 티가 나는 곳은 얼굴이 아니라 환자 팔이었다. 당직실에서 휴대폰을 오래 보고 나온 밤이면, 그는 꼭 수액이 안 들어가는 환자가 없냐고 먼저 물었다. 혈관이 안 잡히는 노인은 요양병원에 얼마든지 있다. 그는 커튼을 치고 혼자 들어가 바늘을 꽂았다. 한 번에 들어갈 혈관도 일부러 비껴 찌르고, 뺐다가 다시 찌르고,..

미스테리,역사 2026.10.22

우울증이 겹쳐졌다. (괴담)

준혁을 처음 본 건 동네 정신건강의학과 대기실이었다. 목요일 오후 3시 예약 시간이 같아서, 2주에 1번씩 의자 2개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어느 날 약국 앞 벤치에서 약 봉투를 뜯다가 눈이 마주쳤고, 처방전을 맞대 보니 약 이름도 용량도 똑같았다. 준혁이 말했다. 이거 먹으면 슬프진 않은데, 기쁘지도 않죠. 내가 2년 동안 의사 앞에서 설명하지 못한 말이었다. 샤워 1번이 등산처럼 느껴지는 아침도, 아무 이유 없이 지하철 문 앞에서 다리가 안 움직이던 출근길도, 준혁은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았다. 3번째 만난 날 우리는 사귀기로 했다. 우울한 사람 2명이 만나면 우울도 반으로 나뉜다고 믿었다. 그날 밤 준혁의 원룸에서 남은 약을 전부 변기에 쏟고 같이 물을 내렸다. 약이 우리를 우리 같지 않게 만든다고..

미스테리,역사 2026.10.20

의처증 남편의 외도 (혐오)

남편은 퇴근하면 신발도 벗기 전에 손부터 내밀었다. 내 휴대폰을 달라는 뜻이었다. 통화 목록, 카톡, 사진첩, 최근 삭제한 사진 폴더까지 다 보고 나서야 손을 씻었다. 내 차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는 매일 밤 뽑아 가서 컴퓨터로 돌려 봤다. 그러면서 남편 휴대폰은 늘 식탁 위에 화면이 보이게 놓여 있었다. 잠금도 없었다. 난 숨길 게 없으니까,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명절에 친정에 가서도 남편은 엄마 앞에 자기 휴대폰을 내밀었다. 장모님, 저는 비밀번호도 안 걸어요. 문제는 얘예요. 그날 밤 엄마는 나를 따로 불러 남편 속 좀 그만 썩이라고 했다. 그게 결혼 3년째부터였고, 지금은 결혼 9년째다. 처음엔 사랑이 넘쳐서 그런 줄 알았다. 그다음엔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다니던 회사는 팀장이 남자라..

미스테리,역사 2026.10.19

당신 먼저, 너 먼저 (괴담, 슬픔)

아들이 우리 부부 수발을 든 지 올해로 21년째다. 내가 61살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오른쪽 팔다리가 굳었을 때 아들은 31살이었고, 다니던 회사를 그날로 그만뒀다. 8년 전부터는 아내가 치매로 밤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요양원도 2곳이나 보내 봤지만 다른 노인을 때려서 2번 다 쫓겨 왔고, 내 연금으로는 1명 몫도 빠듯했다. 요양보호사가 하루 3시간 다녀가면 나머지 21시간은 전부 아들 몫이었다. 기저귀 갈고, 내가 욕창 안 생기게 2시간마다 돌려 눕히고, 새벽마다 슬리퍼 바람으로 단지를 돌며 제 엄마를 찾아왔다. 아들 손목에는 나를 돌려 눕히다 붙인 파스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장가도 못 갔고, 머리는 나보다 먼저 하얘졌다. 그 말을 들은 건 올봄이었다. 새벽 2시쯤 부엌에서 소주병 내려놓는 소리가..

미스테리,역사 2026.10.17

야쿠자와 기타노 다케시 일화 (괴담)

기타노 다케시가 《소나티네》 등의 야쿠자 영화로 흥행가도를 달리던 시절, 일본 야쿠자 조직원들 사이에서도 그의 팬이 꽤 생겨났다고 한다.일부 조직은 다음 영화에 자기네 구미를 주역으로 등장시켜 협객다운 이미지를 부각해 달라며 청탁을 넣기도 했고, 고가의 선물을 보내는 등 나름대로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그러던 어느 날, 기타노의 영화에서 사람을 죽인 뒤 시체를 드럼통에 넣어 처리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를 본 한 야쿠자 조직원이 무언가 마음에 걸렸는지, 기타노의 개인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비트 상(기타노), 영화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엔 드럼통에 시체를 넣는 짓은 안 합니다."잠시 뒤, 그 남자는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배를 깊게 가르고 바다에 빠뜨..

미스테리,역사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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