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4세와 바이에른 공녀 엘리자베트 사이의 외아들로, 1252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태어났다. 1254년 콘라트 4세, 예루살렘 국왕으로서는 콘라트 2세가 서거하면서 예루살렘 국왕, 시칠리아 국왕, 슈바벤 공작 직위를 물려받았다. 콘라딘은 ‘어린 콘라트’라는 뜻이다. 시칠리아 국왕으로는 콘라트 2세, 예루살렘 국왕으로는 콘라트 3세, 슈바벤 공작으로는 콘라트 4세로 표기된다. 유명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그의 고조부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외숙부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의 보호를 받으며 독일 땅에서 자랐다. 시칠리아 왕국과 예루살렘 왕국은 친척들이 섭정을 맡아서 다스렸다.
같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이복숙부 만프레트는 왕위를 노리다가 1258년 콘라딘이 서거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시칠리아 국왕에 오르기도 했다. 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뿐만 아니라 그 후임들까지도 콘라딘의 조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 때부터 내려오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정책에 지속적으로 대립해왔다. 알렉산데르 4세는 외국 혈통이 시칠리아 국왕으로 있는 것에 불만을 표하며 적대적으로 대했다.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콘라딘은 슈바벤을 오가며 계속 독일에 머물렀다. 1258년 만프레트가 시칠리아 왕위를 찬탈하자 지역 귀족들이 원정을 요청했지만, 보호자였던 루트비히 2세는 위험하다며 반대했다. 1266년이 되자 교황 클레멘스 4세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왕자인 앙주의 샤를을 새 국왕으로 임명했다. 샤를과 만프레트는 베네벤토 전투에서 맞붙었는데, 이 싸움에서 만프레트는 전사했다.
프랑스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 시칠리아 왕국의 귀족들이 독일까지 찾아오자 콘라딘은 이탈리아를 향해 출군을 결심했다. 북부의 베로나까지는 무사히 이동했지만 루트비히 2세가 독일로 돌아가 버리면서 재정이 바닥났다. 여기에 교황 클레멘스 4세의 훼방이 계속되면서 콘라딘은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정치적 혼란에 지친 이탈리아 귀족들이 전국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콘라딘을 도왔다. 교황은 콘라딘을 파문했지만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1267년 가을, 만프레트의 편을 들던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의 아들 파드리케가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두 명의 살아 있는 왕과 한 명의 죽은 왕이 한데 엉켜 싸우는 형국이 되었다. 다행히 파드리케는 콘라딘의 편을 들었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남부 전체로까지 콘라딘의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1268년 8월, 샤를은 다시금 호엔슈타우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탈리아 중부 탈리아코초에서 콘라딘의 군대와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콘라딘은 초반에 승기를 잡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분열을 보였다. 콘라딘의 다국적 군대, 특히 스페인 기사의 열의는 처음에는 승리를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샤를의 계략인 샤를이 언덕 뒤에 숨겨두었던 베테랑 프랑스 기사는 궁극적으로 샤를에게 승리를 거두게 했다. 패퇴하던 콘라딘은 결국 샤를에게 잡혀 나폴리에 유폐되었다. 이후 1268년 10월 29일 반역죄로 열여섯 살의 나이에 참수형을 당하였다.
<콘라딘의 처형을 묘사한 한 그림>
콘라딘은 준수한 외모에 뛰어난 언어 능력을 갖췄으며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가 남긴 음유시와 노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독일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추모의 대상이 되었던 [1847년 바이에른의 왕세자인 막시밀리안은 그를 기리기 위해 대리석 조각상을 세웠다.] 콘라딘이 서거한 후 호엔슈타우펜의 직계 남성 가계는 단절되었고 영토는 여러 개로 갈라졌다. 시칠리아 왕국은 앙주의 샤를의 손에, 슈바벤은 분할되었다.
<예루살렘 왕실 일부 계보>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 | |||||
시빌라 | 보두앵 4세 |
이사벨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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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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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 알리스 | 멜리장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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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2세 ※ |
마리 | 이사벨 | 안티오키아의 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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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2세 |
브리엔의 위그 | 키프로스 국왕 위그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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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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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둘째 황후이자 예루살렘 여왕이다.
콘라딘의 남긴 다른 왕국인 예루살렘 왕국은 이사벨 1세의 후손들 사이에서 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장자 상속의 상속인은 브리엔의 위그였지만 키프로스 국왕 위그 3세는 이미 콘라딘의 섭정을 맡았으며 예루살렘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키프로스 국왕 위그의 가장 큰 문제는 예루살렘 왕좌를 주장하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의 집요함이었다. 위그는 1273년에 교황청에 그녀의 호소에 답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마리는 이미 1269년부터 키프로스의 위그가 두려워했던 지중해 지배 야망을 가진 앙주의 샤를에게 자신의 주장을 매각하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통치자이자 유명한 프랑스의 십자군 국왕 루이 9세의 형제로서 그는 군사적, 외교적으로 위그와 경쟁할 수 있었다. 샤를은 또한 개인적으로 위그에게 적대적이었으며 마리의 예루살렘에 대한 주장과 브리엔의 위그의 키프로스에 대한 주장을 장려하였다. 마리의 샤를에 대한 매각은 1277년 3월 교황의 승인을 받아 완료되었다. 몇 주 안에 샤를의 대표자가 예루살렘 왕국의 아크레에 도착했고 대표자는 샤를을 예루살렘의 국왕으로 선포하고 귀족들에게 샤를에게 충성을 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영지의 소유자인 티레의 장과 베이루트의 이사벨은 계속해서 키프로스 국왕 위그를 합법적인 국왕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위그는 사후 자신의 아들 장 2세에게 예루살렘 왕위를 물려주었다.
http://mrlee.co.kr/pc/view/mystery/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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