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자]
언제부턴가 진자가 나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텅 빈 공간에 선 내 앞으로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야 한 번씩 지나가는 진자,
처음엔 일 분이었고, 천 번을 셈하자 꿈은 끝났다.
땀으로 흥건한 침대를 박차고 확인한 날짜는 다행히 하루가 지나있었다.
그러나 찰나처럼 지나가던 진자는 나날이 길어져 시간마다,
결국엔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야만 한 번씩 지나가곤 했다.
놓치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단 하루일뿐인 꿈속에 영겁을 바친 채.
진자가 천 번 흔들리기를 바로 세어야 했다.
진자가 해마다 돌아오는 걸 놓쳐가며 겨우 천 번을
세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젖은 침대에서 일어난 날,
나는 오늘을 살지 않기로 결심하고 목을 매달았다.
의외로 평온한 기분,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혀를 길게 뺀 채 매달린 내 주검이 정면에 놓인 거울 앞에 비춰지고 있는데도.
설마, 꿈 속의 꿈..
비참한 결말이다. 내가 ‘진자’가 된 것일까.
어떤 외력도 없이 저 진자가 천 번을 흔들려야만..
[사랑으로 길러줘]
여친과 헤어졌습니다. 제가 헤어지자고 했구요.
뺨도 맞고 걷어차이기도 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예쁘고 상냥한 그녀는 끝까지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왜 멍청한 짓을 해버렸냐구요?
그녀의 자취방에 갔을 때 일입니다.
반투명한 상자가 천장에 닿을 듯이 쌓여있었죠.
상자마다 햄스터가 암수 한 쌍씩 들어있더군요.
저도 길러본 동물이라 압니다. 번식력이 좋을 텐데.
10개가 넘는 상자에선 매 주 돌아가며 새끼가 나올
겁니다. 새끼들이 자란다면 또 새끼를 치겠죠.
분양을 보내기도 벅찰 수준입니다.
“자기야, 햄스터들 새끼 낳으면 어떻게 하고 있어?”
그 말을 하며 옷을 걸어두고자 무심코 옷장에 다가갈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처리해 왔을거라 짐작은 했습니다만..
옷장을 연 순간 저는 라면을 끓이고 있던 그녀를 내버려둔 채 조용히 집으로 향했죠.
그 뒤 벌어진 결과가 앞서 말한 이별입니다.
그때 그 옷장 안에서 모피코트 두 벌을 봤습니다.
패턴이 알록달록한..
푸딩,펄,정글,푸딩,펄,정글,푸딩,펄..
[오렌지색 군소]
해운대의 시끌벅적한 여름이 올해는 왠지 싫었다.
비교적 가깝고 너무 한산하지도 않다는 남해군에
꽂힌 나는 친구 두 놈과 함께 여름휴가를 남해로
떠났고, 상주해수욕장, 설리해수욕장을 옮겨다니며
한여름 밤을 보낼 파트너들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두곡-월포라는 두 마을에 이어진 해수욕장에서 운명의 그녀들을 만났다.
3:3 인원도 딱.
펜션에 짐을 두고 정신없이 놀다 발견한 건 군소.
처음엔 징그럽다며 피하던 그녀들 앞에서 해양학을 전공하는 친구 녀석이 아는 척을 떨었다.
그래봤자 한 줄 요약하자면 ‘달팽이 같은 거’였지만.
인서울 학벌에 뒤지기 싫었던 나는 오렌지빛 군소를 팔에 올리고
'이거 봐라!'하며 유치한 장난을 떨었고, 유치한 전략이 유효했는지 관심은 내 쪽으로 향했다.
“달팽이진액이 피부에 좋다던데에-?”
어느샌가 용기를 낸 그녀들에게 군소를 옮겨주었고,
물놀이 대신 그녀들이 선탠을 즐길 때 동안 군소는 몇 번이고 그녀들의 전신을 기어다녔다.
공짜 달팽이팩이라나.. 문제는 즐거웠던 즉흥만남이 끝난지 일주일째.
잠시 군소를 올렸던 부분의 피부가 쓰라리다 못해 검게 죽어버렸다.
난 괜찮지만.. 그녀들이 걱정된다.
[봉래산]
부산 사시는 분, 특히 영도구 사시는 분들! 봉래산이라고 아시죠?
네, 고신대학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 볼 수 있는 그 낮은 산이요.
한 2,3년 지난 일인데 어차피 인터넷이니까 그 날의 경험을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얘기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때 고신대학교 뒤쪽으로 등산로 공사를 한다고 입산금지 팻말이 붙어있었어요.
하지만 저희는 부산 야경을 찍겠다고 (죄송합니다. 서울역에서 KTX 타고 야경 한 번 찍겠다고 갔던거라..)
무심코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렸는데도 역시 안 될 놈은 안 될 모양인지!
안개가 살짝 껴서 야경 찍기엔 별로였어요.
그래도 정상 인증샷은 찍고 가자고 정상 표지석 앞에 포즈를 잡고 섰는데 친구 새끼가 꽥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저것 보라고, 친구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왠 송전탑처럼 생긴 구조물(방송시설이 있다나봐요.) 끝이었는데,
그정도 거리에 있는 사물은 맑게 보였는데도 흰 색의 묘한 실루엣이 탑 위에 서있더군요.
그 실루엣도 저희를 쳐다본단 느낌이 들자마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탑을 내려오더니,
등산로가 아니라 나무가 무성한 낭떠러지 위를 달려서 사라져버렸어요.
제 착각이라기엔 같이 봤던 친구들이 있어 잊지 못할 경험입니다.
혹시 입산금지를 어긴게 문제가 될까봐 여지껏 말은 안 했습니다만..
하도 입이 근질거려서 익명을 빌어 얘기해봅니다.
[순경 첫 출근]
민중의 지팡이란 말에 혹해서 2년을 끙끙댄 끝에 순경 시험에 합격했던 날로부터 25년,
산전수전 다 겪으며 경찰로서의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지금까지도 잊히질 않는 기억이 있다.
이제 와선 추억 비슷하게 얘기하는 수준이지만 그땐 한동안 악몽까지 꿨었지.
교육을 마치고 시보 자격으로 일선에 첫 배치되던 날,
나는 미리 해당 경찰서의 선배를 통해 상급자 전원의 얼굴과 이름, 계급을 교육받은 터였다.
안녕하십니까, 경례를 붙였지만 누구 하나 환영해주는 이 없었다.
현장은 역시 무겁구나, 가시방석에 앉은듯 따갑게 시간을 죽이던 중 선배들 커피컵을 씻어놓으라는 허드렛일을 첫 임무로 부여받고 들어선 화장실에 멋진 정복 차림의 그가 있었다. 다들 근무복 차림인데 행사 때나 입을만한 차림으로 ‘열심히 해.’라고 대뜸 말하던 그. ‘예’ 하고 커피컵을 씻는 동안 어디로 가버렸는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업무를 가르쳐 줄 직속 선배가 순찰로부터 돌아오고나서야 겨우 궁금했던 걸 물어볼 수 있었고,
‘OOO 선배님은 왜 정복 차림이십니까?’라고 물어보자 날 외계인 보듯 쳐다보던 그의 대답.
‘OOO 경사 뺑소니 추격하다가 가드레일 들이박고 일주일 전에 고인 된지 오래야. 너 누구랑 착각하고 있는거야?
본서 분위기도 그거 때문에 개판이구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정신 안 차려?’
그 일 덕분에 항상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하모니]
여고 1학년 시절, 우리와 같은 년도에 학교로 전입오신 음악 선생님과 함께 합창부가 신설되었습니다.
첫 인원, 첫 대회였기 때문에 밤 늦도록 모두 모여 함께 합창을 연습했죠.
하지만 그 날 평소처럼 녹음한 노래를 듣기 위해 틀었을 때 저희는 낭랑한 여학생들 목소리 틈에 섞인
낮고 날카로운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누구의 장난이냐고 화를 내봐도 나올리 없었고
그 목소리는 당연히 우리 중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녹음할 때 누군가 기침한 소리, 그것 때문에 중간에 선생님이 끊고 다시 가자는 소리까지 녹음되어 있었구요.
의아함에 다시 처음부터 노래를 연습하고 녹음 파일을 틀 때 저희는 다들 귀를 반쯤 막은 채 노래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남자 목소리는 녹음되어있지 않았고, “뭐야, 안 나오네.” 라며 누군가 안도하며 살짝 투정을 부렸죠.
그 순간 ‘산 너머- 사는 곳-..’ 하며 스피커로부터가 아닌 천장으로부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려왔고
저희는 선생, 학생 가릴 것없이 혼비백산한 채 합창부실을 뛰쳐나와버렸습니다.
그 뒤로 합창부는 연습실을 바꾸기도 했지만 그 날의 트라우마가 남은 학생들이 합창부를 나가버리면서 합창부 자체가 유명무실해져버렸습니다.
https://mrlee.co.kr/pc/view/story/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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