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테리,역사

용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썰)

미스털이 사용자 2024. 7. 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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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금입니다.>

 

 

살인마를 용서하는 사람들은
천사인걸까?   비록 살인죄를
언도받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실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명헌은 얼음장 같은 손을
입김에 녹이며 교도소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출소하기로 되어 있는 남자는 

3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주범이었다.


같은 반 학생을 잔혹하게
괴롭히다가 끝내는 철로 위로
뛰어들게 만든, 그 광경을
촬영해 인터넷에 유포시킨
악인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명헌 역시
얼떨결에 그 동영상을 보았다.
2분 정도 되는 짧은 영상에는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피해자가 벌떡 일어나 달리는
순간부터, 등을 떠밀리듯
지하철 철로 위로 뛰어드는
순간까지가 담겨져 있었다.
피해자는 놈들을 피해 선로를
넘어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선로로 내려가기 직전에
열차가 다가오고 있다는 안내음이
들려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가해자들은 그런 피해자를
“병신새끼”라고 킬킬 비웃었다.


그때 누군가가 커터칼이 위험하게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칼날을 보여 위협했고, 피해자는
눈을 질끈감고 선로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넘어진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쓰러진 그의
몸 위로 전철이 지나갔다.


2분 몇 초.
그 짧은 영상 안에 그 모든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났건만,
명헌은 놈들의 킬킬 대던
웃음소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하이에나의 킬킬거리는 울음소리처럼,
놈들의 웃음은 낮게 그르렁대며
반복적으로 귓바퀴를 울려댔다.
그때, 곁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삼십대 남자가 명헌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명헌처럼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못보던 얼굴인데, K사에서
나왔나? 신입?”

 

명헌은 그가 선배인 박 기자와 대학동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얼른 고개부터 숙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박 기자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보나마나 그 놈이 귀찮아서 

자기 대신 내려 보낸 거겠지? 

오늘 새벽이나 어젯밤에서야 호출을
받았을 테고.
아니, 호출이라기보담 통보가
맞으려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놈 게을러터진
거야 뻔하지.
박 기자가 어떤 놈인데,
이런 영양가 없는 취재를
하려고 새벽부터 눈발 맞으며
몇시간씩 운전해서 내려오겠냐.”


“그래도 3년 전에는 최고
이슈였잖아요.
취재경쟁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말대로 3년이나 지난 일을,
누가 기억이나 하겠어? 

설사,
관심갖는대도 

금세 잊어버리겠지.
인터넷만 켜면 딸을 강간하고
임신시킨 아버지나 애들 장기를
팔아먹는 조직 얘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사람들도 점점 무뎌지는 거야.
자극적인 사건에 길들여지는
거지.
3년 전에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지
이젠…….”  

 

그가 고개를 저으며, 

 

“하루에 소비되는
기사가 얼마나 많은데.”

하고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정수리에 쌓였던 눈이
흩어져 내렸다.


명헌은 새삼스런 시선으로
교도소 앞에 모인 수십의
인파를 보았다.
일반인이 대부분이었다.
선배 기자의 말대로 취재경쟁을
벌일 수고도 불필요해보였다.


“그런데도 선배님은 여기까지
내려오셨네요.” 

 

“응? 나야……그때
이 사건을 맡았었거든.
공판까지 따라갈 정도로 열정적으로
달려들었었거든.”  

 

“세 명 중에 두 명은 1년 6개월씩
선고받았다고 했던가요?”


“상해죄밖에 받아내지 못했으니까
별 수 있나?”   

 

“다른
한명은요?”  

 

“영상에 찍힌
칼 때문에 살인미수에, 

영상 유포로 명예훼손, 

다른 피해자들까지
합쳐서 이런 거 저런 거
다 끌어다가 6년 몇 개월을
받아놨는데 항소를 한 거야.
내가 어려서 아직 철이 없었어요.
폭력적인 부모 밑에 자라느라
악영향을 받았어요, 하면서
질질 짠 거야

그 영악한 새끼가.
그래서 줄고 줄어서 3년을
살게 된 거지.”  

 

이야기를 듣는 

명헌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가해자들한테 편리한 세상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관심을
받은 사건이니 만큼 본보기로
삼아 마땅한 대가를 치렀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1년 6개월~3년형이라니.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사건이후의 일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는 거였다.
명헌 자신 역시.


그렇게 잊혀진 무관심 속에서
가해자들은 살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른 두 놈도 악질적이지만,
이놈은 악마도 이런 악마가
없을 정도였는데.
폭행 살인 사건을 전담하는
형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단
말야.
그런데도 어리다는 이유로
봐준다네? 기가 막힐 노릇이야.
열일곱살 밖에 안 된 새끼가
사람을 죽였어.
그것도 피를 말리다가 죽인
거야.
열일곱 살이면 고1인가?
1학년 맞지? 

씨발, 나 고등학생 때는 선생 몰래
야한 잡지 돌려보는 일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는 말을 마치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필터를 문 입술이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슬픔을
토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앞쪽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교도소는 문을 열고, 비슷한
머리모양을 한 남자 몇 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저기 나오네요.”  

명헌은 기억을 되짚으며 

가해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3년 전에 열일곱의 나이였으니
이제 스무 살이 되었을 터였다.
스무 살, 입에 담기만 해도
달콤하고 풋풋함이 느껴지는
나이였다.
명헌은 선로 위에서 무참히
짓이겨진 피해자가 갖지 못한
스무 살을, 살인마는 가졌다는
게 너무나 불공평하게 생각됐다.
조금 뒤, 명헌은 드디어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
색이 조금 바랜 청색 남방,
유행에 뒤처지는 스타일의
검은색 통바지를 입었다는
것만이 그가 3년 동안 유배됐던
증거였다.


그것 외에는, 그는 너무나
평범했고, 너무나 멀쩡해보였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무 살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를 발견한 건 명헌만이
아니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의 반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성난 황소무리처럼
불을 뿜으며 살인마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3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피해자를
기억하고, 그를 죽인 가해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돌려 말하면, 

겨우 십 수 명의 사람들만이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고작 열 몇 명의 사람들이.
고작…….


“뻔뻔하게 두 눈뜨고 서있는
것 봐라.
저 안에서 팔자 좋게 두
발 뻗고 살다 나오니 좋니?
응? 네가 죽인 불쌍한 학생은
아직도 눈을 못 감고 구천을
떠돌고 있을 텐데!”  

 

이성을 잃은 중년 여자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가, 뺨에 손톱자국을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하얗게 내려앉는 눈발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놓으세요.
죗값을 치르고 나온 사람한테
무슨 짓입니까, 이게.”


머리가 희끗한 중년남자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
그들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방패처럼 막아섰다.
손톱자국을 낸 여자의 눈이
매서워졌다.


“당신은 또 누구야? 애비라도
돼?! 오호라.
그럼 당신이 애미겠군.
이런 흉악한 놈을 낳고 미역국을
끓여 드셨어?”   

 

화살은,
중년남자의 옆을 지키고 있던
부인에게로 향했다.
인상이 닮은 게, 오랫동안
함께한 부부인 것 같았다.
부인은 말없이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서 가해자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믿을 수 없게도, 부부는
가해자를 보호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죠? 가해자
부모는 연락을 끊었다고 들었는데.”

 

“그 애 부모야.” 

 

“그 애요?” 

 

“피해자 최영진. 걔 부모들이야.”  

 

어째서? 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최영진의 아버지는 목사야.
부자간에 사이가 유별나게
좋았다던가.
그래서인지 최영진 역시 아버지처럼
종교인이 되고 싶어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더군.”


사람들 중에 부부의 얼굴을
알아본 누군가가 외쳤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 악마같은 놈을 싸고 돌다니.
아들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그 불쌍한 애를 벌써 잊어버린
거야?! 아님 악마에 씌기라도
한 거야?!”  

 

“우리는
이 애를 용서했습니다.”


남자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저희 부부는 3년 간 이곳을
오가며 황도준 군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도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요.
제 아들처럼, 도준 군도
불쌍한 아이일 뿐입니다.
저희는 도준 군을 아들로
삼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겠지 않습니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사람들은 멍하니 서서, 살인마를
차에 태우는 부부를 지켜볼
뿐이었다.
살인마를 용서하는 사람들은
천사인걸까?   비록 살인죄를
언도받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실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악행을 용서 받았다면? 

게다가 그를 용서하다
못해 아들로 삼아 새 기회를
주고 싶다 한다면? 

저 부부는 천사인걸까, 

이 미쳐가는 세상에 

새로이 태어난 변종인걸까?


명헌은 초점이 흐려지는 시야를
겨우 바로 하며 셔터를 눌렀다.
그의 곁에 서있던 선배 기자는
이미 카메라를 내리고, 찌푸린
눈으로 멀어져가는 차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부의 이러한 용서는 당연하게도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최영진의 안타까운 죽음이
새삼 화제로 떠올랐고, 어딜
가나 부부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보다 더 들끓는 관심사는
바로 ‘용서’에 관한 거였다.
가해자를 용서한 사례가 전무했던
건 아니었다.
가해자를 용서하는, 이와
비슷한 사례는 국내에서도,
외국에서도 존재했다.
이렇게 큰 화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어느 방송인은,
부부를 두고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용서라고 말했다.
어느 유명인은 목사인 남편을
공격하며 종교문제를 걸고넘어졌다.
그의 이 용서를 그릇된 믿음
이라고 말했다.
부정을 저버린 미신, 그의
이 표현 때문에 종교단체에서
펄쩍 뛰었음은 당연했다.


“뭐?”  

 

박 기자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명헌이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말하기도 전에, 박 기자의
눈썹을 이미 하늘을 향해
치켜올라가 있었다.


“3년이나 지난 사건이 

다룰 게 뭐가 있어서 

기사를 쓰겠단 거야? 

네가 가서 캔다고 해서 

새로운 사실이 튀어나올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최영진 군 부모님들에 관한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너도 유행에 빠진 거냐?”


“유행요?” 

 

 

“요즘 그 사람들
때문에, 너도 나도 용서한다고
난리들이잖아.
SNS 들어가 보면 가관도
아니다.
보여주기식의 과시용 용서가
진짜 용서인 줄 아나.”


“그런 건 아닙니다.” 


명헌은 주눅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행을 좇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가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박 기자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너 좋을 대로 해.” 


“영양가 없는 생고생을 자청하겠다는데”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말하는 ‘영양가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했다.


시상식에서 있었던 노출사건?
한 벌에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의상을 입은 톱스타의 인터뷰?
최근 연예계에 불고 있는
모 배우의 불륜설?   

대체, 어느 게 영양가 있는 

기사란 거지.


그러나 명헌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인사만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오전부터 조금씩 내린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하얗게 뒤덮인 거리엔 발자국
하나 찍혀 있지 않았다.
그 광경은 왠지 달콤해보이기도
했고, 삭막해보이기도 했다.

 

 

* *     

 

 

“벌써 몇
분이 다녀가셨어요.
하나같이 거절했습니다.
저희는 인터뷰에 응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어요.”


“최근에 검정고시에 

합격하셨다구요.”


부인은 넉살좋게 말을 붙여오는
명헌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침일찍부터 찾아와서 저렇게
버티고 있었다.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선 굳게
닫힌 방을 쳐다보고 있었다.
친한 아주머니 말벗이 되어주려
온 사람처럼 굴고는 있어도,
결국은 목적이 있어서 찾아온
사람이었다.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그 방은 아들, 최영진의
방이었다.

현재 황도준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아들의 방을, 아들을 죽인
살인마에게 내주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일이었다.
이런 점들로 목사 부부를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런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목사라는 이름에 맞게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부인은 얼마나 살림을
알뜰하고 깔끔하게 하는지,
집안에는 머리카락 한 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인은 완고한 입장이었지만
명헌처럼 구는 사람은 없었던지라,
점점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명헌이

 

“아직 점심식사 전이시면
자장면 어떠십니까? 

제가
아주 맛있는 집을 알고 있는데.”


하고 능청스레 핸드폰을 꺼내는
모습을 보고는 두 손 들고
말았다.


명헌은 며칠에 한번씩 이
집에 드나들면서 조용히 관찰했다.


목사 부부와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본심이 무엇인지, 도대체
용서란 어떤 것이기에 아들을
죽인자를 집안에 끌어들일
수 있었는지를 캐내려고 했다.


황도준을 아들로 입양해서
사고로 죽음을 위장해 살해한
뒤, 보험금을 타내려는 수작인가
상상했던 적도 있었다.


종교의 이름을 드높여 잇속을
챙기기 위함인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명헌의 눈에 비친 부부는
순수하기만 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한 것처럼 보였다.
목사 부부도 부부였지만,
무엇보다 황도준의 변화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피와 악행으로 얼룩진 황도준의
삶은 서서히 구원받고 있었다.
구정물에서 건져올려지고 있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의 눈빛은 나날이 유순해져갔다.
예전, 친구들을 동원해 힘없는
학생들을 괴롭히던 사람은
완전히 사라졌다.


목사를 따라 교회에 다니며
성경책을 끌어 안고 살았다.
게다가 의외로 요리에 재능이
있어서 목사 부부의 지원
아래 대학 진학을 준비하기도
했다.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사소한 언성높임 조차 없이,
화목하기만 했다.
황도준을 친아들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용서.


이 단어가 가지는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사람을 갱생시키고, 영혼을
구했다.
그 과정을 직접 곁에서 목격한
명헌으로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부의 순수한 마음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정한 용서를.
그는 단 한 줄도 써내려가지
못한 기사에 마침표를 찍을
때라는 걸 직감했다.


“중국에 갈 일이 생겨서
내년에야 귀국할 것 같습니다.
수능날까지 못 기다려서 미안하다.
대학 합격하면 연락해.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마.”


명헌은 술병을 기울여 목사의
잔에 가득 따랐다.
목사는 전에 없이 술을 몇
잔 받아 마셨다.
이 자리는 명헌의 마지막
인사를 위한 자리였다.
그동안 명헌과 정이 들었던
건지, 목사 부인도 볼이
은은하게 달아오를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갈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게다가 등록금이 한두푼도
아니고, 그것까진 죄송해서…….”


도준의 말에 목사가 얼굴을
굳혔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당연히 가야지.
대학에 가고, 졸업해서는
요리로 유명한 나라에 가서
좋은 스승 만나 배우고……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가족을 만들어야지.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해.
누구보다 더 많은 기회를
얻고, 누구보다 떳떳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술기운 때문인지 목사의 목소리는
살짝 격앙되어 있었다.
명헌은 새삼스레, 그가 도준을
얼마나 아끼고 자식처럼 생각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도준에게라면 뭐든지
아낌없이 주었다.
친아들에게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비행소년은,
화목한 집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우린 네가 부모로 생각했으면
한다.
진짜 부모처럼.
아니, 부모로 여겼으면 한다.
가끔은 어리광도 부리고 투정도
부리는……진짜 아들처럼.”


부인이 한마디 거들자, 도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철이 들어오는 선로로 뛰어든
소년을 보고 킬킬 웃던 하이에나가,
유순한 영양 한마리가 되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날, 명헌은 마지막으로
하룻밤 신세를 지고 가기로
했다.


주량을 넘어서서 마신 덕분에
돌아갈 상태가 아니기도 했지만,
부인이 이불까지 깔아주며
막는 바람에 신세를 지기로
한 것이다.


새벽,  명헌은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물을 찾아 부엌으로 가던
그는 무언가 섬뜩한 느낌에
걸음을 멈추었다.


도준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문 사이로 낮게 코고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상할 게 없는 광경이었음에도,
명헌은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방 안으로 들어갔다.


“!!!!"

 

그는 눈을 부릅떴다.

 

목사였다.

 

목사가 서있었다.

 

늘 정돈된 모습만 보였던
그가 잠옷 차림으로 도준의
방에 서있었다.
목이 약간 늘어난 셔츠에,
사각 트렁크팬티를 입은 그의
뒷모습은 명헌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순간 그의 뒷모습은 목사가
아닌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목사가 들고 있는 것, 하늘
높이 치켜 든 손에 들고
있는 것.

 

그것은 칼이었다.


번쩍번쩍 거리는 칼날의 반사된
빛이, 명헌의 눈을 아리게 했다.


깜짝 놀란 명헌이 방으로
뛰어들자 목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칼을 내려놓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무리 술에 취했대도…….”


목사는 표정없는 얼굴로 명헌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과 두어 시간 전에,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던 

인자한 목사님의 얼굴은 

가면이었던 것처럼, 

돌처럼 하얗게 굳은
얼굴로 서있었다.


명헌은 입을 다물었다.
그를 쳐다보는 목사의 눈에는
취기라곤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취해서가 아니다.
취해서가 아니야.
순간 명헌의 온몸에 충격이
휩쓸고 지나갔다.
저들은 황도준을 미워하고
있었다.
살의를 견디지 못하고 칼을
들고 찾아와 자는 사람의
목에 겨눌만큼 증오하면서,
그토록 다정한 친절을 베풀었던
이유가 뭘까.

 

“……왜………?”  

 

명헌의
의문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는 목사의 기묘하게 찢어지는
입술을 보며,

황도준이 석방되던 날, 

선배 기자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우는
것 같기도 했던, 그 기묘한
입매를.

 


* *    

 

 

새벽, 명헌은
귀신에 쫓기는 사람처럼 밖으로
뛰어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출국할 날이 다가오자, 그는
자연스레 목사 부부와 황도준을
떠올렸다.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황도준의
친부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냈다.
목사 부부가 큰돈을 주며
인연을 끊고 살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또한 알아낼 수 있었다.


황도준이 복역하는 동안에,
가해자 중 나머지 두 명이
의문의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었다는 것 또한 어렵잖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 두 명은 사고로 인해
영구적인 장애를 얻었고 

사고의
가해자는 끝내 밝혀내지 못한
채 수사가 종결되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노력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전화 몇 통과 방문 몇 번
만으로, 단 며칠만에 밝혀낸
사실이었다.
명헌은 조사한 파일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녹음기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의심했더라면,
더 의문을 품었더라면 실마리를
잡아냈을 터였다.


그런데, ‘용서’라는 단어
하나에 모두 스스로 눈을
가리고 부부의 연기에 속아
넘어간 거였다.
세상에 별일도 다 있구나,
그런 놈을 용서하다니 정말
대단한 걸, 하면서.


그가 목사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목사와 황도준은 부재중이었다.
그의 부인만이 집을 지키고
있다가 명헌을 맞이했다.
그녀는 냉랭한 얼굴로 명헌을
안으로 들였다.

 

그날밤에 있었던 일을 목사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이제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너무 허물없이 지냈던
것 같아.
명헌 군은 기자니까, 앞으로
이야기 하고 싶다면 미리
연락을 주고 와요.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진실에 관한 거죠.”  

 

명헌은
말을 마치며, 슬그머니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진실? 누가 봐도 명백한
사건에 무슨 진실이 필요하죠?
내가 아는 진실이라면 하나밖에
없어요.
내 불쌍한 아들과, 그 애를
사냥감 쫓듯이 몰고 가 열차에
뛰어들게 만든 살인마.
그 살인마를 고작 3년이란
죗값을 치르게 만든 이 썩어빠진
사회.
그 살인마가 불쌍한 척 

자길 변호하며, 

항소하는 걸 두
눈뜨고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모의 무능력함…….”


“……가해자 두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심부름센터에서 사람을
고용한 걸 알고 있습니다.
증명할 기록도 찾아냈구요.”


“나를 고발할 건가요?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쓰레기를
치우려고 한다는 죄목으로?”


“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정당하게
죗값을 치르고 나온 사람입니다.
자경단원도 아니고 개인이
임의로 벌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에요.
게다가 부군께선 종교에 몸담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여전히 차분하게 명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명헌은 저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왜죠? 왜……그렇게 증오하는
사람을 데려다가 아들처럼
보살펴주고, 아들의 방까지
내어주면서까지 돕고 있는
겁니까.
복수를 하고 싶은 거라면,
했던 방법대로 사람을 고용해
쉽게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너무 쉽다는 게 문제였죠.
우리는……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아팠던 만큼, 

우리 애가 괴로웠던 만큼 

평생을
괴로워하고 후회하며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사지를 끊고,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고 싶었죠.
그 두 명이 영원히 휠체어에
앉아 살게 되고, 침대 신세를
지게 만들었는데도 억울한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어요.
황도준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죠.
그 앤 정말 악질이었어요.
피해자들한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우리 애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차마 눈을 뜨고 보고, 들을
수 없을 지경으로.
그 놈 입으로 

거짓으로나마
사과를 듣기 위해 찾아간
날이었어요.
우리가 찾아간, 그날 새벽에
자해를 해서 병동에 실려갔다더군요.
병동에서 나온 황도준은 바로
그날 밤에 목을 매달았어요.
가까스로 구해내긴 했지만,
앞으로 또다시 자해를 하리란
건 뻔했죠.

 

그애는 악마였어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사람을 괴롭히고, 순수한
영혼을 짓밟기 위함인 것처럼.
정말이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어떤 걸 뺏는다고 해도 그
애는 괴로워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을 거란 걸 깨달았어요.
하나 가진 목숨조차도 쉽게
내버리려고 하는 애였으니까요.”


부인의 목소리와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날밤 목사의 생기없던 얼굴과
똑같았다.


“우리의 계획은 10년이에요.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돈도, 직업도, 가족도,
꿈도, 희망도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10년이면
변화시키는 게 가능할 테니까.
그렇게 되기까지, 우린 아낌없이
도울 거예요.
그 애가 꿈을 이루고 사회적
명성을 얻고, 가족을 얻었을 때……

모든 걸 빼앗을 거예요.”


미쳤다.
이 사람들은 미친 게 분명하다.
명헌은 당황한 나머지 녹음기가
들어있는 가방을 의식하고
말았다.
“기사를 쓸 건가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도 이 대화를 녹화하거나,
녹음하고 있을 테죠.” 

 

“……!”


“놀라지 마세요.
그건 오히려 저희가 바라는
거니까요.”  

 

바란다고?
부인은 연이은 충격에 사로잡힌
명헌에게, 예전의 그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명헌 군은 기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면 돼요.
우리 편에 서달라는 부탁은
않겠어요.
아니, 오히려 진실을 낱낱이
밝혀주세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명헌 군의 이야기를 

듣고 깨닫게 해주세요.


이 세상 어떤 악인이라도,
어떤 끔찍한 살인마라고 해도,
결국은, 언젠가는 잃을 것이
생긴다는 것을요.

 

그들이 피해자들한테서 우습게
뺏어간 꿈과 희망이 담긴
삶을, 당신들 역시 뺏길
수 있다고.
그들 역시 가여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말예요.”

 

 

* *   

 

 

그 뒤로 명헌은
부인의 요구대로 그녀를 찾아가지도,
연락 하지도 않았다.
출국 준비를 핑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사흘 뒤, 그는 공항으로
향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운전하는 그의 한 손에는
녹음기가 쥐어져 있었다.
진실이 담겨있는 녹음기.
그는 그때까지도 결정내리지
못했다.
이 파일을 공개할지, 말지에
대해.
부인은 그들의 계획이 완성되는
10년 후까지 기다려달라는
부탁조차 하지 않았다.

 

말없이 집을 떠나는 명헌의
등에 대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말을 입에 담았더라면, 그는
녹음기와 자료를 박 기자한테
떠넘겼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명헌은 녹음기를 손 안에서
강하게 쥐었다 폈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공항이 가까워지자, 그는
창문을 열고 녹음기를 도로에
내던져버렸다.

 

그리곤 미련 없이 핸들을
움켜쥐고 속도를 높였다.
콰직, 들릴 리 없는 소리가
그의 가슴 깊이 처박혔다.


이 소리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여운 최영진의 마지막 비명처럼,
킬킬 거리던 황도준의 웃음소리처럼,
덤덤하게 진실을 고백하던
부인의 목소리처럼, 칼을
든 채로 마치 우는 것처럼
웃고 있던 목사의 흐느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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