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군대를 막 전역하고,
대학 복학 전까지 호프집에서 일을 하던 무렵의 이야기다.
내가 일을 하던 곳은
대단지 아파트 상가 1층에 자리한 호프집으로,
우리 집에서 약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다지 큰 술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작은 것도 아니었다.
테이블이 12개는 되었으니까.
적지 않은 규모에 동네 장사를 하는 집이다보니
때때로 삭아보이는 민짜들이 위조 신분증을 들고
술을 먹으려 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 날도 아주 앳되 보이는,
절대 성인은 아닌 것 같은
민짜 무리가 술을 먹겠다고 들어 앉았다.
주민번호 앞자리 88을 교묘히 커터칼로 긁어내
86으로 만든 것을 캐치하고
퇴짜를 놓자
녀석들은 간간히 욕도 섞어가며
혼잣말을 내뱉고는 가게 문 밖으로 사라졌다.
한 시간하고도 15분쯤 지났을까,
가게 바깥에서 경찰차의 사이렌이 울렸다.
경찰이 누굴 잡아가는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라 사장님과 나는 가게 바깥에 나와
무슨 일인지 보고 있자니
아까 그 민짜들이 경찰차에 줄줄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가게 바로 옆에 있던
다른 호프집 알바가 나와 발을 동동 구르길래
담배 한 대 피자며 끌고와 물어보니 가관이었던 모양이다.
이 간도 큰 녀석들은
그 조악한 위조 신분증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자
넷이서 소주를 연달아 6병을 마시고는
술에 취해 '이 집은 민증 검사가 허술하다.'느니
'다음에도 여기 와서 술 먹어야겠다.'느니
'중3짜리 여자애 여기 불러다 같이 마실까.'하는
헛소리를 고래고래 내뱉었던 것이다.
옆 호프집 알바친구와 사장님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술을 판 대상이 민짜라는 걸 알았지만,
이미 팔아버린 술을 도로 담을 수도 없고
경찰을 부르면 업주만 손해를 입기에
모른 척 적당히 마시다 가주었으면 했는데
다른 손님들이 그 녀석들의 이야기를 듣고선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해준 옆집 알바는
거의 다 피운 담배를 건물 벽에 비벼끄며
요즘 사정이 어렵다던 자기네 가게 사장을 걱정해주면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우리 가게 사장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그런 진상 민짜를 무사히 가려낸 공로를 인정받아
5만원이란 거금을 용돈으로 받았다.
그때까지만해도 옆 가게에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그러나 한국의 공무원들은
의외로 신속하고 자비심이 없었다.
그 다음 날 오후 3시에 한창 주방에서
안줏거리 밑준비를 하는데
옆 가게가 또 시끌시끌했다.
나중에 사장님이 전해주길
시청에서 공무원들이 나와
영업정지 3달을 때리고 가더란 것이다.
사장님은 '옆 가게 형님 요즘 아버님도 돌아가신지 얼마 안된데다
어머니도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시다는데..' 하며 혀를 찼다.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났을까..
여전히 옆 호프집은 굳게 닫혀있었고,
검게 선팅된 유리문위의 너무나도 잘 보이게
하얀 영업정지 공문만 슬슬 노랗게 바래지고 있었다.
날이 더워져 손님들도 많아지고
에어컨 없는 주방에 앉아
펄펄 끓는 기름 옆에서 양파 까는 것도 힘들어질 때였다.
'저기요! 저기요!' 소리에 주방에서 나와 카운터 쪽으로 나가보니
사장님은 어디 가셨는지 안 보이고
검은 반팔 티에 베이지색 모자를 눌러 쓴
아주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아주머니는 '여기 사장님 어디 계세요?
혹시 옆에 호프집 사장님 최근에 본 적 있어요?' 라며
거의 사정하듯이 울먹였다.
몇 주 전에 뵌 것이 마지막이다라는 대답을 해드리고
우선 앉아서 물이라도 한 잔 하시라고,
사장님 이제 곧 올거라고 말씀 드리고
카운터쪽 싱크대에서 아주머니를 계속 힐끗 거리고 있자
사장님이 들어와 아주머니를 아는 체 했다.
'엇 형수님 웬일이십니까?'
'아니 우리 남편이 일주일 전에 나가서
핸드폰도 꺼져있고 연락이 안되고
내가 하다 못해 시아버지 무덤에도 가보고 그랬는데
아무데도 없어요..'
울먹이던 아주머니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오죽했으면
동생네 여기도 와서 남편 어딨는지를 묻겠냐고 ....'하며
엉엉 우는 아주머니를 계속 쳐다보기가 민망해져서
슬그머니 주방에 들어가
기포 올라오는 치킨 기름통이나 보고 있자니
바깥에서
'형님 혹시 지금 가게에 계신 것 아닙니까?'하는
사장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게엔 혹시 들러보셨어요 형수님?'
'아니요.. 가게 열지도 못하는데 거기 가서 뭐하겠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신김에 한번 들러보시죠..'
라는 대화가 오고가더니
두 사람 모두 가게를 나가는 듯 했다.
쪄죽을 것 같은 주방에서 나와
다시 카운터에서 빈둥대려던 차에
'아아악!!!!!!!!!!!'
하는 아주머니의 소리가 들리더니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장님이 황급하게 가게로 뛰쳐들어왔다.
가게 문이 열리자
후끈한 여름 공기와 함께 그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역겨운 냄새가 가게로 훅 들어왔다.
하수구 냄새와 시장 뒷골목 생선들이 썩어가는 냄새가
동시에 난다면 그런 냄새일까?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구나를 느끼면서
'뭐에요 무슨 일이에요' 하니
사장님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500잔에 수돗물을 잔뜩 따라 나가면서
'경찰이랑 119 불러라 빨리!' 하고
다시 황급히 나가는 것이었다.
우선 119부터 누른 나는
'네 119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하는 질문에
'아... 저... 그..' 라고 얼떨떨해 했다.
우리 사장님이 119랑 경찰 부르랬어요 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가게 밖을 지나던 사람들이 '으악!' '뭐야 사람이 죽은거야?' 하는 소리에
'아... 사람이 죽은 것 같습니다..' 라고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경찰과 구급차가 오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구급차가 아주머니를 먼저 실어가고..
사장님은 경찰과 함께 가고..
그 날 저녁 장사는 거의 못하는 상태로 하루가 지났다.
주방 이모와 내가 둘이서
어찌어찌 가게를 열어두고 있자니
밤 11시쯤 사장님이 그 어떤 때보다 지친 모습으로
가게에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사장님에게 묻고 싶었지만,
어두운 얼굴로 핼쓱해져 돌아온 사장님에게
뭘 묻기가 어려웠다.
사장님은 가게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조용히 앉아계시다가,
30분쯤 지나자
내게 '오늘은 가게 일찍 닫고 같이 술이나 한잔 하자.'며
주방 이모에게도
이제 기름기 전원 끄라고 했다.
손님들을 거의 반강제로 내보내고
뭔가를 느낀 주방 이모가 특별히 신경 쓴 김치찌개 앞에
세 사람이 둘러 앉았다.
'자 나한테 한 잔 따라줘.' 하며
사장님은 내가 따라준 술잔을 연거푸 세 번 들이키더니
옆 가게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옆집 형님이..
최근 아버지상도 당하고..
어머님도 위중하시고..
그래서 요즘 심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힘들었나보더라'고...
'가게를 열 때
퇴직금에 대출까지 받았는데
장사가 잘 안되다보니
대출을 한도까지 받았던 모양이더라'고..
'그런데 아버님 상 당하고,
어머님도 몸져 누으셔서 돈이 필요한데
1금융권에선 대출이 어렵다보니 사채도 쓴 것 같더라'고...
'형수님은 이삼일 연락이 안되니까
빚 때문에 도망갔나도 싶었는데
형님이 집에 걸어둔 외투 옷 주머니에서
최근에 쓴 이혼서류를 발견하고
이건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그 때부터 형님 찾아다니기 시작했다더라'라고...
'두 분 사이에서 자식도 없어서
형수 입원하는 것 수속 밟고
이것저것 조사 받고 오느라 늦었다'고...
'유서도 있었는데 보험금으로 빚 갚으라더라.'고..
'오늘 같은 날 집에 일찍 들어가야 되는데..
도저히 형님 마지막 모습이 잊히질 않고
이렇게 집에 들어가면
가족한테 못 보일 모습 보일 거 같아 한잔 하려 한다..' 고...
그렇게 혼자서 한참을 이야기 하며
혼자 소주 2병을 마신 사장님은
취해서 잠든 채로 택시를 타고 댁으로 들어가셨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우리 사장님은 옆 가게 사모님과 돌아가신 사장님네 어머님을
일주일에 한번씩은 찾아가며 자기 일처럼 돌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다시 두 달이 지나고
옆 가게는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가
바닥재와 천장재가 뜯어져 훤히 드러나고,
유리창도 없어져 휑하게 기둥만 남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꺼라고 생각한다.
손님이 '저기요!' 하고 부르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네! 잠시만요!'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생기게 된 것이.
누가봐도 민짜인 애들이 호프집 문을 열려고 하면
잠긴 것처럼 몇번 덜컹덜컹하는 소리를 내게 된 것이.
그리고 깊은 새벽 테이블 정리를 마치고
가게를 나가기 전 어렴풋이 테이블에 엎드려 흐느끼는 듯한
옆집 사장님의 모습이 보이게 된 것이.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되뇌이곤 했다.
'사장님.. 사장님 가게는 여기가 아니에요..'
일을 그만두고 대학에 복학 후,
내게 잘 대해줬던 사장님에게 인사라도 하려고
오랜만에 들른 가게는 이미 빈 상가가 되어있었다.
과연 그럴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https://mrlee.co.kr/pc/view/story/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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