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테리,역사

기장의 목숨을 건 비상 착륙이 있었다. (대한항공 902편 피격사건)

미스털이 사용자 2023. 7. 10. 17:32
반응형

<텍스트를 읽기 불편하시면 동영상 먼저 보세요.>

 

대한항공 902편 보잉 707기는 1978년 4월 20일 파리를 출발하여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한 후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1978년 4월 20일 당일 902편은 이륙 예정시간보다 40분 늦게 파리 오를리 공항을 이륙한다.

 

이륙당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평범한 비행이 되는듯했다.

 

그런데 5시간 뒤에 뜻밖의 일이 생긴다.

 

 

 

 

 







이게 여기로 가는게 맞나.....?

 

 

당시 항법사의 실수로 902편은 갑자기 멀쩡히 가다가 방향을 튼다.

 

902편은 북극 상공에서 갑자기 방향을 크게 꺾어 소련의 무르만스크 방향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조종사와 항법사는 지금의 항로가 맞는지를 두고 다투었으나 기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였고,

 

그렇게 시속 900km의 비행기는 순식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고 만다.

 

 

그렇다면 왜 저기로 갔을까?

 

먼저 당시 시대의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에는 GPS가 군사용으로만 사용되던 시기였고, 당시 902편에는 INS(관성항법장치)가 달려있지 않았다.

 

902편은 구식항법장치인 LORAN을 사용했는데 당시 LORAN의 기지국 중 하나가 작동을 하지 않았다.

 

이근식 항법사는 후에 "비행 경로상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LORAN 스테이션이 있어 항로를 정확히 잡아주었어야 하지만, 당시 두 스테이션이 모두 작동하지 않아 LORAN이 먹통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항법사는 자연스레 나머지 옵션인 자이로컴퍼스, 나침반, 육분의, 태양의 방위 등 고전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하여 경로를 제시해주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 두번째 옵션이었던 자이로컴퍼스는 고위도로 갈수록 지구 자전 반경이 감소함에 따라 동쪽으로 틸트와 드리프트가 생겨 측정값의 신뢰도가 감소하여 LORAN보다 부정확했다.

 

게다가 당시 902편의 자이로컴퍼스는 고장난 상태였다. 

 

그러면 마지막 옵션은 나침반이었는데 마지막 옵션인 나침반은 당시 902편이 지나던 북극항로가 자북극 근처를 통과하므로 편각이 너무 커져 올바른 방향을 알기 어려웠다.

 

902편의 비행 궤적이 자북극 근처에서 크게 틀어지는 것을 보면, 고장난 자이로컴퍼스 대신 나침반을 이용해 방향을 잡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측정장비를 신뢰하기 어려웠다면 육분의를 사용해 방위를 직접 관측할 수도 있었으나 구름이 많아 사용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해가 떠있는 위치가 반대가 된 것은 특별한 지식이 없는 탑승객들도 창밖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기장도 항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싸웠다는 것을 보면 이를 모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태양의 방향이 반대가 되었더라도 북극권 극점 근처에서는 방위의 특성이 일반적인 중~저위도 지역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방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정확히 어떤 방향인지 알아채는 것은 계기 없이는, 특히 아음속으로 고속비행하는 항공기에서는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 902편에게는 비극이었다.

 

그렇게 결국 902편은 소련 영공으로 진입했다.

 

 


당시 카렐리야의 주요 군공항 위치 및 KAL 902편의 비행경로. 

Afrikanda(431방공군)와 Poduzhemye(265방공군) 기지의 요격기들이 출동하였다.

 

 


당시 Afrikanda 기지(431방공군)의 Su-15TM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자마자 소련군의 레이더에서는 대한항공 902편을 미국 공군의 RC-135 정찰기로 오인한다.

 

902편이 진입한 지역은 방공기지가 밀집된 소련 해군 북방함대의 모항인 무르만스크 상공이었고 소련 방공군은 20시 54분에 레이더로 영공 400km 밖에서 자신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대형 항공기를 발견한다. 

 

소련 방공군은 이 미확인 기체에 25분간 무전으로 접촉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반응 없이 그대로 영공을 넘어오자 21시 11분에 Su-15 요격기를 긴급 발진시켰다. 

 

 

 

 


일본인 승객 오오타니 기시오(50)가 대한항공 902편 기내에서 촬영한 알렉산드르 보소프의 Su-15TM.

 

 

431 방공군의 아프리칸다(Африканда, Afrikanda) 군공항에서 긴급 발진한 알렉산드르 보소프(Александр Босов) 대위의 Su-15TM이 영공 침범 5분만에 대한항공 902편 조종석에 가까이 접근하여 기체를 좌우로 롤링하는 등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한항공 902편의 김창규 기장은 보소프의 Su-15TM를 발견하고 기체 외부의 항법등을 모두 켜고 속도를 줄여서 지시를 따르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국제 공용 비상주파수 121.5MHz로 계속 접촉을 시도했으나 Su-15TM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Su-15TM에는 UHF(300~3,000MHz) 대역 무전기만 설치되어 있어서 해당 주파수를 수신하지 못했을 것이고 보소프는 영어를 못했기에 대응하기 어려웠을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21 방공군의 지휘관 블라디미르 차르코프는 902편이 본인들 지시를  무시하고 핀란드 쪽으로 급격히 기수를 선회해 달아나려 한 것 으로 오해하고 곧바로 10 방공군의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장군에게 허가를 받은 뒤 격추를 명령했다.

 

보소프는 민항기임을 주장하며 몇분간 격추를 거부하다가 결국 21시 42분에 명령에 따라 미사일을 발사한다.

 

 

 

 


미사일 파편에 손상된 동체 내외부의 모습

 

 

 

보소프가 발사한 R-60 빔펠 열추적 미사일은 첫 발은 빗나갔으나 두번째 발이 왼쪽 날개 끝을 맞춰 4m 가량이 떨어져나가고 파편에 의해 동체에 구멍이 다수 생겼다. 

 

이 때 미사일 파편에 머리를 맞은 한국인 승객 방태환(36)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어깨와 오른팔에 중상을 입은 일본인 승객 스가노 요시타카(31)도 과다출혈로 의식을 잃어 사망했다.

 

이외에 13명이 부상을 당했다.

 

피격 직후 동체에 생긴 구멍으로 인해 객실 감압 경보가 뜨자 김창규 기장은 즉시 기수를 내리고 분당 5,500피트(1,676.4m)로 급강하하여 고도를 35,000피트(약 10,000m)에서 3,500피트(약 1,000m)로 낮췄다. 

 

이때 소련군의 방공 레이더에서도 사라지고 구름을 뚫고 강하하면서 보소프의 시야에서도 사라진다. 

 

그는 대한항공 902편이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지상에 아무런 화재나 충돌 흔적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지 못했고, 5분이 넘는 급강하 동안 승객들도 추락 중이고 곧 죽는 것으로 생각했다. 

 

승객인 시오자키 세이코의 노트에는 "우리는 이제 다 죽을 것 같다. 우리는 추락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시점에서 교대를 위해 265 방공군의 Poduzhemye 기지에서 유리 노보질로프(Юрий Новожилов), 아나톨리 케레포프(Анатолий Керефов), 세르게이 슬로보드치코프(Сергей Слободчиков), 알렉산드르 겐베르그(Александр Генберг)가 탄 네 대의 Su-15TM이 발진했다. 

 

이 때 미사일에 떨어져 나간 KAL 902의 왼쪽 날개 파편이 레이더에 잡히자 차르코프는 크루즈 미사일이나 버려진 스파이 장비로 판단했고 세르게이 슬로보드치코프가 R-98MR 레이더 추적 미사일을 발사해 공중에서 파괴한다.

 

 

 


착륙지점 접근방향쪽 도로와 철로의 위치. 기장은 원래 도로에 착륙을 시도하려 했으나 기차가 나타나 기수를 올렸다.


비상 착륙 시도


22시 45분 아나톨리 케레포프 대위의 Su-15TM이 2600피트(약 800미터) 고도에서 저속으로 날고 있는 대한항공 902편을 발견했고 12분 후에는 알렉산드르 겐베르그 소령의 Su-15TM도 따라붙었다. 

 

이들은 대한항공 902편을 아프리칸다(Африканда, Afrikanda) 군공항으로 유도하던 중 얼어붙은 코르피야르비 호수를 발견하고 강제 착륙시켰다. 

 

소련측은 미사일 피격 후 902편을 약 1시간 20분간 유도해 가다가 얼어붙은 호수 등 착륙할만한 지형을 발견하고 대한항공 902편의 날개를 자신이 탑승한 Su-15TM의 날개로 계속 눌러서 착륙하라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김창규 기장과 이근식 항법사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큰 도로에 착륙하려 했으나 기차가 나타나 급히 기수를 올렸고, 눈쌓인 긴 얼음호수를 발견하고 착륙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창규 기장은 모든 악조건을 뚫고 비상착륙에 성공한다. 

 

 

승객을 가득 태워 무거운 대형 여객기로 미사일에 맞아 한쪽 날개 끝이 잘린 상태에서 마찰력이 거의 없는 얼음호수 위에, 그것도 무려 야간에 비상착륙을 시도하여 부상자 하나 없이 성공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이는 순전히 김창규 기장의 뛰어난 조종 실력 덕분이었다. 

 

역대 전세계 민항기 추락 사고 중에서 인명 피해 없이 불시착에 성공한 극히 드문 케이스다. 소련군도 민항기 조종사의 환상적인 기동에 대해 특기할 만한 사례로 분석했다고 한다.

 

 

 

 

 

 

 

비상착륙 다음날의 모습. 왼쪽 주익(날개) 끝부분이 손상된 것이 보인다.
 
 
 
902편의 기적에는 운이 굉장히 많이 따랐는데 고정 표적이나 다름없는 대형 민항기에 발사된 두 발의 고기동 미사일이 아예 빗나가거나 날개 끝에만 맞아 계속 비행이 가능했던 점 등 운이 굉장히 좋았을 뿐더러, 소련 방공군 측에서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아 대부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기서 고기동 단거리 미사일인 R-60이 한발은 아예 빗나가고 한발은 열원인 엔진이 아니라 날개 끝에 맞았다는 점이 상당히 의아한데, 이는 자기가 요격하는 항공기의 정체가 민항기임을 확실히 확인하고 격추 지시를 한동안 거부했던 알렉산드르 보소프가 의도적으로 날개 끝에 맞췄을 가능성이 있다. R-60은 락온 없이 tactical drop으로 발사하면 근접신관이 작동하는 상태로 무유도 직선비행을 한다.
 
 
당시 인접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5방공군 예브게니 그로보프스키 대령이나 10방공군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장군 등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항공 902편을 레이더로 발견한 순간부터 인접 부대 지휘관들 간에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즉각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한다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규정대로 요격기를 접근시켜 착륙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는데 그 결과 탄두가 작은 공대공 미사일이 발사되었고 대한항공 902편이 큰 피해를 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후에 민항기로 확인된후에 소련군 지휘관들은 안도했다고 한다.
 
 



비상착륙한 902편에 접근해 감시하는 소련 병사들의 모습.
 
 
 
승객들은 불빛 하나 없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착륙한 불 꺼진 비행기 안에서 2시간 동안 떨며 앉아 있었으며, 이후 군인들이 나타나자 미군인가 하다가 소련군인 것을 알고는 공포에 빠졌다고 한다. 
 
다행히 소련군은 승객들을 최선을 다해 잘 대해주었는데, 하마터면 민항기를 격추시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대형사고를 낼 뻔했으니 일을 더 키우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비행기에 올라 승객들의 여권을 걷은 뒤 3대의 대형 헬리콥터를 동원해 켐(Кемь / Kem)이라는 지역의 군사도시로 부상자, 여자, 아이들부터 이동시켰고 따뜻한 장교 클럽에 남녀로 나누어 재우고 잘 먹였다.
 
 
 

식사를 제공받는 승객들의 모습
 
 
한밤중에 군인들이 동원되어 장교 클럽의 내부 집기류가 치워지고 충분한 양의 침대와 담요가 설치됐으며 지역 주민들은 조리 도구와 관을 만들었다. 
 
승객의 대부분인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위해 쌀을 구해다 밥을 지어주었고 유럽인 승객들에겐 햄버거 패티와 곡물, 삶은 감자가 제공되었다.
 
영유아를 동반한 승객들은 쌀밥 외에는 주는 음식을 모두 거절하고 직접 요리를 하려 했으며 레닌그라드에서 온 당 간부들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뭐든 구해주라고 하여 의사들이 고생했다고 한다.
 
 

당시 승객들이 머물렀던 Poduzheme 기지의 1970년대 모습.
 
 
이렇게 첫날 밤이 지나고 둘째 날에는 승무원과 승객들이 KGB에게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승객들은 스파이 혐의가 없다고 판단되어 모두 돌려보내진다. 
 
당시 대한민국과 소련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이 중재했고, 승객들과 객실 승무원들은 팬암의 보잉 727에 타고 우선 중립국인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로 이동한 후, 대한항공이 헬싱키로 보낸 또 다른 707에 타고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김창규 기장과 이근식 항법사는 추가 조사를 받은 후 역시 핀란드를 통해 귀국할 수 있었다.
 
 
 
 
후에 902편의 항법사였던 이근식씨는 사건 31년 후인 2009년, 902편은 "자이로콤파스가 고장난 상태였으며 비행시간을 지키기 위해 안전을 무시한 비행을 했다", "안전을 위해 회항을 했어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예춘추 1983년 11월호에는 일본인 승객 '오오야'씨가 비상착륙 후 김창규 기장에게 물었을때 "항법사쪽의 계기는 당초부터 고장이 나 있었다"는 대답을 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조종사들의 수많은 증언들까지 고려하면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즉, 사고의 원인이 된 902편의 급격한 항로변경은 결항이나 지연을 피하기 위해 항법장치가 고장난 항공기를 수리하지 않고 무리하게 운항했기 때문으로, 당시 대한항공의 "규정이고 뭐고 까라면 까라"는 식의 막무가내 운영이 이 사고의 주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978년 5월 1일 귀국 중간 경유지인 스톡홀름 공항의 김창규 기장(가운데)와 이근식 항법사(왼쪽)
 
 
 

1978년 5월 3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김창규 기장(가운데)와 이근식 항법사(왼쪽)
 
 
 
 
후에 김창규 기장의 조종사 자격은 이 사건으로 취소되었고 책임을 느낀 김 기장은 대한항공에 사표를 제출했지만, 이는 수리되지 않고 대신 지상 근무를 했다. 
 
그러나 그는 9개월 만인 다음해 1월에 다시 조종사 자격에 응시, 합격했으며 곧바로 동형기인 707기 기장으로 복직했다. 
 
5월에는 대한항공 최고 영예인 창공금상을 받고 7월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에서 AVG-CNAC 항공인상을 수여받는 등 책임을 덮어씌우기는커녕 뛰어난 조종 실력으로 비상착륙에 성공시켜 대참사를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 공로에 맞는 명예로운 대우를 받았다. 
 
부기장과 기관사, 항법사 역시 김창규 기장과 함께 사표를 제출했으나 항법사 이근식만 사표가 수리되어 떠났고, 부기장과 기관사는 조사가 끝난 뒤 전원 복권, 복직되었다.
 
 


김창규 기장의 장례식 모습 2009년
 
 
 
이렇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기쁨도 잠시 5년뒤 최악의 비극이 찾아온다.
 
 
 
 
 
 
사건명 :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발생일 : 1978년 4월 20일
 
유형 : 조종사 과실, 민항기 격추
 
출발지 파리 오를리 공항 
경유지 앵커리지 국제공항 
도착지 김포국제공항
 
탑승 인원 : 승객 97명 승무원 12명
 
사망 : 2명
 
생존 : 107명



 

http://mrlee.co.kr/pc/view/mystery/589

 

[미스털이] 대한항공 902편 격추사건 (기장의 목숨을 건 긴박했던 비상착륙)

<텍스트를 읽기 불편하시면 동영상 먼저 보세요.>대한항공 902편 보잉 707기는 1978년 4월 20일 파리를 출발하여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한 후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1978년 4월 20일 당일 902편

mrlee.co.kr

 

반응형